책이야기

숨결이 바람 될 때: 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, 폴 칼라니티 지음

bob1art 2023. 3. 9. 23:05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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숨결이 바람 될 때

 

죽음 속에서 삶이 무엇인지 찾으려 하는 자는

그것이 한때 숨결이었던 바람이란 걸 알게 된다.

새로운 이름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고, 오래된 이름은 이미 사라졌다.

 

세월은 육신을 쓰러뜨리지만, 영혼은 죽지 않는다.

독자여! 생전에 서둘러

영원으로 발길을 들여 놓으라.

 

- 브루크 풀크 그레빌 남작

<카엘리카 소네트 83번>

You that seek what life is in death,

Now find it air that once was breath.

New names unknown, old names gone:

Till time end bodies, but souls none.

Reader! then make time, while you be,

But steps to your eternity.

- Baron Brooke Fulke Grevile,

"Caelica 83"

 

 

 

서른여섯, 촉망받는 신경외과 의사

10년간 하루 14시간씩 이어지던 고된 수련 끝에

일류 대학병원들의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고

가족과의 평범한 휴가도 꿈꿀 수 있게 되었을 때

갑자기 맞닥뜨린 폐암 4기 진단.

 

죽음을 마주한 사람에게

무엇이 인생을 살 만한 가치가 있게 하는가?

하나의 생명이 사라져갈 때

또 다른 생명을 낳아 기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?

폴이 떠나기 8개월 전 딸 케이디가 태어났다.

그가 사력을 다해 집필하다 미처 완성하지 못한

이 책의 에필로그는 아내 루시가 마무리했다.

 

"슬픔 말고도 다른 감정들이 끈질기게 남았다.

옆에 없어도 계속 그를 사랑한다는 것이 기쁘다.

투병 생활을 함께 겪어내며 완치를 바랄 순 없었지만,

그 대신 다른 많은 것들을 누릴 수 있음을 깨달았다."

 

 

신경외과의는 정체성이라는 혹독한 용광로 속에서 일한다.

모든 뇌수술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본질인 뇌를 조작하며,

뇌수술을 받는 환자와 대화할 때에는 정체성의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.

거기에 더해 뇌수술은 대개는 환자와 그 가족에게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이며,

그래서 인생의 중대한 사건들이 그렇듯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.

 

이처럼 결정적인 전환점에서 요점은 단순히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

어느 쪽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이다.

 

가령 당신이나 당신의 어머니가 몇 달 더 연명하는 대가로 말을 못한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?

치명적인 뇌출혈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낮은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시력 손상을 감수해야 한다면?

발작을 멈추려고 하다가 오른손을 못 쓰게 된다면?

당신의 아이가 얼마만큼 극심한 고통을 받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말하게 될까?

 

심각한 뇌 손상으로 인한 독특한 고통은 때로는 환자보다 가족에게 더 큰 아픔을 준다.

그래서 그 의미를 완전히 납득하지 못하는 건 의사뿐만이 아니다.

뇌를 다쳐 머리를 깎고 누워 있는 사랑하는 이의 주변에 모인 가족들 역시 그 의미를 완전히 깨닫지 못한다.

그들은 과거를 본다.

 

그동안 쌓아온 추억, 새삼 느껴지는 사랑의 감정, 이 모든 것을 그들 앞에 놓인 몸이 대변한다고 생각한다.

하지만 나는 앞으로 들이닥칠 미래를 본다.

 

외과 수술로 목에 뚫은 구멍을 통해 연결된 호흡보조기,

복부에 낸 구멍으로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는 투명한 액체,

장기간 지속되는 고통스러운 치료 과정과 불완전한 회복.

때로는 환자가 사람들이 기억하는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.

 

어느 날 밤, 옆에 누워 있던 루시가 물었다.

"여보, 가장 무섭거나 슬픈 일이 뭐야?"

"당신하고 헤어지는 거."

나는 아기가 생기면 우리 가족에게 큰 기쁨이 되리라는 걸 알았다.

게다가 내가 죽은 뒤 루시에게 남편도 아기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었다.

하지만 나는 최종적인 결정은 루시가 내려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.

결국 그녀 혼자 아기를 키워야 할 텐데,

내 병이 악화되면 나까지 돌보느라 더 힘들 것이었다.

"아기가 생기면 우리가 제대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을까?" 루시가 물었다.

"아기와 헤어져야 한다면 죽음이 더 고통스럽지 않을까?"

"그렇다 해도 아기는 멋진 선물 아니겠어?" 내가 말했다.

루시와 나는 고통을 피하는 것만이 삶은 아니라고 느꼈다.

 

결국 이 시기에 내게 활기를 되찾아준 건 문학이었다.

너무나 불확실한 미래가 나를 무력하게 만들고 있었다.

돌아보는 곳마다 죽음의 그늘이 너무 짙어서 모든 행동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.

 

하지만 나를 짓누르던 근심이 사라지고,

도저히 지나갈 수 없을 것 같던 불안감의 바다가 갈라지던 순간을 기억한다.

여느 때처럼 나는 통증을 느끼며 깨어났고,

아침을 먹은 다음엔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.

'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.'라고 생각하는 순간,

그에 대한 응답이 떠올랐다.

 

그건 내가 오래전 학부 시절 배웠던 사뮈엘 베케트의 구절이기도 했다.

"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."

나는 침대에서 나와 한 걸음 앞으로 내딛고는 그 구절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.

"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,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(I can't go on. I'll go on)."

 

중병에 걸리면 삶의 윤곽이 아주 분명해진다.

나는 내가 죽으리라는 걸 알았다.

하지만 그건 전부터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.

내가 갖고 있는 지식은 그대로였지만 인생 계획을 짜는 능력은 완전히 엉망진창이 됐다.

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기만 하면 앞으로 할 일은 명백해진다.

만약 석 달이 남았다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이다.

1년이라면 책을 쓸 것이다.

10년이라면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하는 삶으로 복귀할 것이다.

 

우리는 한 번에 하루씩 살 수 있을 뿐이라는 진리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.

그 하루를 가지고 난 대체 뭘 해야 할까?

 

"아버님, 따님을 한번 안아보시겠어요?"

간호사가 내게 물었다.

"글쎄요, 내 몸이 너무 차가워서."

이가 딱딱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.

"그래도 안아보고 싶어요."

그들은 내 딸을 이불로 감싸서 내게 건네주었다.

한쪽 팔로 아이의 무게를 느끼고 다른 팔로 루시의 손을 잡고 있으니 삶의 가능성이 우리 앞에 펼쳐지는 듯했다.

내 몸의 암세포는 여전히 죽어가거나 아니면 다시 자라고 있을 것이다.

내 앞에 펼쳐진 넓은 지평선에서 나는 공허한 황무지가 아니라 그보다 더 단순한 어떤 것을 보았다.

그것은 내가 계속 글을 써내려가야 할 빈 페이지였다.

 

- 숨결이 바람 될 때: 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, 폴 칼라니티 지음, 이종인 옮김, 흐름출판, 2016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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